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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해병대204기 가수 남진




오빠부대’에도 원조가 있다. 지난 1971년 9월16일 서울 세종로 시민회관 분장실. 당시 스물 여섯살의 젊은 가수가 초조하게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과연 관객이 얼마나 올까.’ 베트남전에 청룡부대로 참전했다가 돌아온 지 3개월 만인 데다 국내 가수로는 첫 리사이틀이라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이날 따라 부슬부슬 비까지 내렸다.

공연시작 1시간 전까지만 해도 관객의 발길이 뜸했다. 그러나 30분 전. 약속이나 한 듯이 관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루었다. 여성 관객이 70%. 역사적인 공연이 시작됐다. 엘비스 프레슬리 의상을 차려 입은 그는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노래를 불렀다. 여기저기에서 ‘오빠, 오빠’ 하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공연은 전례없는 대성공. 이후 공식 팬클럽이 생기면서 ‘오빠부대’는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오빠부대’ 원조…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이른바 ‘오빠부대의 기수’ 남진씨. 흔히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린다. 공교롭게도 남씨와 프레슬리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프레슬리는 21세때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불러 일약 스타가 됐다. 이후 자신이 부른 노래를 소재로 한 영화에도 출연, 팬들을 사로 잡았다.

남씨 역시 21세때 ‘가슴아프게’로 스타가 됐다. 또한 자신의 노래를 영화화한 ‘가슴아프게’‘울려고 내가 왔나’‘별아 내가슴에’ 등에 출연, 더욱 인기를 모았다. 헤어 스타일이나 몸동작 그리고 하얀 가죽옷에 금속장식이 있는 프레슬리 의상 차림으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남씨는 올해로 만 60세이자 가수로 데뷔한 지 꼭 40년째. 그동안 두세 차례 공백기가 있었지만 가요 40년사를 관통하는 빅스타의 길을 흔들림없이 걸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블루스 트로트 왈츠 차차차 트위스트 등 장르를 뛰어넘는 천부적인 가창력과 특유의 무대동작은 인기의 보증수표. 아울러 숙명의 라이벌인 나훈아씨도 아직도 건재를 과시하고 있어 둘이 함께하는 ‘빅쇼’를 기대하는 팬들도 적지 않다.

남씨는 ‘노래인생 40년’을 기념해 최근 신곡을 무려 여섯곡이나 내놓으며 새로운 의욕을 보이고 있다. 신곡은 ‘둥지’와 ‘모르리’에 이어 2년 만이다. 서울 여의도 모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남방셔츠의 윗단추를 두 개 정도 풀어헤치는 평소의 모습을 연상했던 것과는 달리 소탈하면서 깔끔한 옷차림었다.‘원조 오빠’의 멋은 여전히 풍겼다. 우선 신곡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지난 2년 동안 신곡을 준비하느라 무척 바빴다.”면서 원래 일곱 곡을 예정했으나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우선 제외시켰다고 말했다. 대표곡은 ‘저리가’(김동찬 작사·차태일 작곡). 지난 40년 세월을 잘 녹여 담으려고 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8월 특별무대 이어 가을부턴 전국투어

어쨌든 이번 신곡발표를 계기로 제2의 노래인생을 시작하겠다고 몇 차례 강조했다. 이를 위해 특별무대를 마련한다. 신곡과 추억의 히트곡, 또 잘 알려지지 않은 금지곡 등으로 팬들과 새롭게 만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올 가을부터 전국투어를 나서 또 한번 ‘바람몰이’에 도전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와 관련,“노래를 시작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강산이 네번이나 변했다. 정말 세월이 덧없이 빠르다. 하지만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데뷔 당시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소회를 피력했다.

잠시 지난 세월을 회상하던 그에게 공전의 히트곡 ‘가슴아프게’를 불쑥 꺼냈다. 그러자 “원래 제목은 ‘낙도 가는 연락선’이었다.”면서 “작사가 정두수씨의 고향이 하동이라 하동포구를 연상하며 글을 썼는데 너무 올드패션 느낌이 들어 고민 끝에 ‘가슴아프게’로 바꾸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님과 함께’는 작곡가 남국인씨의 부인이 작사한 곡. 처음에는 동요처럼 느껴졌지만 때마침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맞물려 삽시간에 남녀노소가 즐겨 부르는 국민가요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반면 금지된 곡도 여럿 된다고 했다. 데뷔하던 해에 ‘서울 플레이보이’‘울려고 내가 왔나’‘연애 0번지’ 등 신곡을 잇달아 발표했다.‘연애 0번지’의 경우 ‘달콤한 입술로 윙크하는 연애 0번지여∼’라는 노래인데 곧 ‘퇴폐곡’으로 낙인찍혀 금지되고 말았다. 또 이 무렵 발표된 ‘사랑하고 있어요’도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됐다. 그러다 보니 기대하지 않았던 ‘울려고 내가 왔나’가 오히려 인기를 끌었던 것. 시골에서 상경해 고생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한가닥 위안을 주는 노래라는 이유에서였다.

문득 ‘라이벌 나훈아’와 합동공연 여부가 궁금해졌다. 주저없이 “팬들이 원하고 있는 만큼 내년 정도에는 (합동)공연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제는 (팬들에게)보답할 때가 됐다.”며 웃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지만 ‘우정’이든 ‘라이벌’이든 무대에 같이 서면 나름대로 가요계에 의미있는 바람을 불러일으키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모 언론사에서 흥미있는 조사를 했더군요. 대한민국 최고의 라이벌 1위는 ‘정주영-이병철’ 2위는 ‘남진-나훈아’라고요. 사실 나훈아는 나이로 보나 가요계 데뷔로 보나 4,5년 후배지요.‘라이벌’은 흥행사들이 만들어냈지요. 하긴 술자리나 여학교 등에서 ‘남진 팬’과 ‘나훈아 팬’이 서로 나뉘어 싸우는 일도 많았지요. 아무튼 우리 가요사에서 남인수-현인 선배 이후 최고의 라이벌이라고들 합디다. 특히 스타일과 분위기, 고향 등이 극명하게 다르기 때문에 충분히 빅이벤트감이지요.”

나훈아씨와 만나느냐는 질문에 “어쩌다 공연장에서 마주치는 경우는 있어도 별도의 만남은 거의 없다.”고 귀띔했다.

목포 부잣집 장남… 해병대로 베트남 참전

남씨는 자유당 시절 국회의원을 지낸 목포 부잣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목포 북초등학교를 나온 후 부친을 따라 서울에서 경복중학교를 다녔다. 다시 고향에서 목포고를 나온 뒤 평소의 꿈인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한양대 영화과에 진학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65년에 어머니(13년 전 작고)의 전폭적 지지로 가수로 데뷔하기에 이르렀다.

인기가수로서 명성을 막 날리기 시작할 때 돌연 해병대에 입대했다. 일본 공연을 앞두고 병역미필로 불발되자 곧바로 해병대를 자원했던 것. 훈련을 마친 후 청룡부대원으로 베트남의 다낭과 호이안 지역 전투에 참전했다. 여기에서 그는 일주일에 한번씩 사과상자에 가득 담길 분량의 팬레터를 받았다. 대부분 여성팬. 주위 전우들 사이에는 팬레터와 예쁜 사진을 서로 먼저 차지하려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혼에 골인한 전우도 있었다.

“영화 출연은 지금까지 50여편되지요. 윤정희 남정임 문희 등 트로이카 여배우들과 자주 출연했습니다. 특히 남정임은 같은 학과 메이트였지요. 최근에는 2년 전 상영된 ‘대한민국헌법 1조’에서 신부역을 맡았습니다.”

허스키한 목소리와는 달리 스스로 ‘마마보이’라고 말하는 남씨. 그런 가정적 영향 때문인지 자녀들에게도 자상한 아버지이고 싶어한다. 남씨는 부산 출신의 여성과 결혼해 3녀1남을 연년생으로 두었다. 딸 셋은 국내에서 대학에 다닌다. 막내인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 중. 남씨의 딸 사랑은 극진하다. 하루에도 십여차례 전화를 걸어 친구처럼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나눈다. 대신 해가 떨어질 무렵이면 반드시 귀가해야 한다는 엄한 규정을 정했다.

“더욱 아름답고 뜨거운 사랑의 노래 부르겠다”

건강관리를 위해 자택(경기도 분당) 주변의 헬스클럽을 가끔 찾는다. 골프 핸디캡은 10정도이며, 이탈리아 칸초네와 프랑스 샹송을 듣는 취미도 있다.

“(노래 부를)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경험을 잘 살려 더욱 아름답고 뜨거운 사랑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본명은 김남진(金湳鎭). 데뷔 직전 문여송 감독이 ‘남쪽의 보배’라는 뜻을 담긴 ‘남진(南珍)’으로 예명을 지어주었다. 이후 가요계의 보배로 40년 동안 이름값을 했다.

그가 걸어온 길

▲1945년 목포 출생

▲56년 목포 북초교 촐업

▲60년 경복중학 졸업

▲62년 목포고 졸업

▲65년 한양대 영화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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